변화를 수용하고 대화를 가능하게 하자
PART I
이전 블로그 게시물에서 나는 현재의 신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다음 패러다임 전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사회의 지적·기술적 구성 요소의 중심 기둥인 과학은 변화를 주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류가 진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변화를 강조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어쨌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지 않을까? 그리고 왜 지금일까?
시간은 현재이다
우리는 인류 복지, 세계 경제, 환경에 유례 없는 변화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서 급속한 진화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많은 부분이 우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에도 통제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진화이다.
세상에는 과거에 안정적이거나 천천히 진화하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세력이 있다. 여기에는 신념, 사회 구조, 생활 방식, 심지어 우리 주변의 환경이 포함된다. 우리는 우리의 기술, 우리의 생활 방식, 환경, 사회,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힘을 해방했다. 이제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종의 멸종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종의 멸종을 초래할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인류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한발 물러서서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때이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다.
변화를 수용하라
인간은 빠른 변화에 도전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 중 대부분은 길에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물건을 그대로 두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 현대 사회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 경제 시스템이 큰 불안정에 직면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 우리가 집단적으로 도덕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숙이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무언가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옳지 않다. 모든 것이 장밋빛이라면 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변화와 함께 불안정한 시대에 살고 있을까? 변화를 밀어내기보다는 수용해야 할 때이며, 우리를 지탱하는 종의 정당한 진화와 지구의 다음 단계로 변화를 안내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변화를 포용하고 미지의 것을 포용해야 하지만 항상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볼 준비가 되어 있고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결정하고 발생하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이것은 단독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거나 편협한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집단과 정부는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생활 방식의 모래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대화 없이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우리의 오래된 방식의 투쟁, 동료 인간, 자연과 환경, 내면 깊숙이 진실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투쟁은 전 지구적 재앙의 가능성이 있는 결과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부족이 아니다. 인류가 하는 모든 일은 이 행성에 존재하는 전체에 중요하다. 지구는 너무 작고 무한한 시공간의 먼지에 불과하지만 우주를 헤매는 우리의 유일한 고향이다.
과학은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외부 삶을 더 좋게 만들고 우리를 지탱하는 삶을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발전과 방법을 제공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우리는 철학의 초점이었던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이 이제는 과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과학은 본질적으로 윤리적 문제, 무엇이 옳은 삶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에토스에 대해 무지하다.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탱하는 모든 것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위해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변화를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핵심은 진실하고 정직한 대화에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과 영성, 이성적 사고의 최고와 인간의 경험과 정신의 최고 사이의 참되고 열린 대화에서 시작된다.
대화가 중요하. 그리고 대화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이러한 다양한 사고와 생활 방식을 허용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영성, 과학과 철학, 과학과 종교, 사상과 기풍의 기초이다.
향후 블로그 게시물에서 이 관점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포함하여 모든 수준에서 적용하는 방법을 발전시키길 바란다.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으로 세계 시민으로서 지구 생명체의 큐레이터인 우리에게 메시지는 간단하다. 변화를 수용하고 대화를 가능하게 하라.
PART II
이전 블로그에서 우리는 변화를 수용하고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것은 우리가 우주를 보는 방식과 과학이 실행되는 방식 및 진화하는 방식에 적용된다. 이는 지역, 지역 및 글로벌 사회와 그들이 자신과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에 적용됩니다. 신념 체계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개인,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 차원의 변화와 대화 없이는 다른 사람과의 모든 대화가 견고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인류가 진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 생존하려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 블로그에서 이미 변경 사항에 대해 논의한 것을 감안할 때 일부 사람들은 내가 왜 그것을 계속 강조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왜 지금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개인을 위한 변화와 소통
우리 몸에는 수십조 개 이상의 수많은 세포가 있으며 항상 다른 시간대에 변화한다. 그러나 어떻게 든 전신 구조가 통합된 방식으로 유지되어 인간이 대부분의 세포보다 훨씬 긴 수십 년을 살 수 있다. 우리 몸에 있는 비인간 미생물 세포의 수가 우리 자신의 세포보다 적어도 20:1 많다는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 말자. 분명히 우리 몸의 이러한 "외계인" 세포도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세포와 미묘한 공생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들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그들은 우리 없이는 살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말해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세포의 전체 무리는 서로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몸의 다른 모든 것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유기체가 완전한 혼돈에 빠지고 우리는 빨리 죽는다.
우리 몸의 바로 그 세포는 우리에게 변화의 위대한 교훈과 대화 또는 의사 소통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변화와 소통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 물리적으로 말해서, 그것들은 우리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기능하며 살아 있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다른 것들은 완고하게 고정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습관, 관점, 신념 체계는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열려 있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습관, 생활 방식 또는 안락한 지대를 바꾸는 것에 대해 매우 저항하는 경우가 많다.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 질병, 직업 변경 또는 예상치 못한 가족 상황과 같이 우리를 강제하는 외부 요인 때문인 경우가 많다.
외부의 힘이 클수록 우리 앞에 변화의 기회가 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외부의 큰 변화가 종종 큰 재앙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의 급격한 변화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우주적 메시지는 "바꾸거나 죽어라!"가 된다. 변화와 대화를 포용하고 자발적으로 삶의 일부로 삼는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바뀌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시간은 현재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변화에 대해 우리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요컨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우리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의 총체이다. 자아는 많은 다른 의미를 취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것은 분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환상에 대한 감각이다. 분리에 대한 이러한 환상은 인간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모든 것의 근본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서 시작되며 사회에 의해 강화된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개념은 성장하는 십대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거나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기 위해 작동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면으로 보아야 한. 이것이 우리를 집합적으로 이끄는 곳을 살펴봐야 한다. 지금이 바로 이 분리감을 살펴볼 때이다. 다음 블로그에서 에고로 돌아오기에 앞서 지금은 자연과 생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자.
협력과 경쟁
우리 사회는 경쟁과 적자생존을 미화한다.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열망의 발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경쟁에는 목적이 있다. 경쟁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인생의 목표를 추구하고, 탁월하고 발전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경쟁이 다른 요인의 배제에 맹목적으로 몰리면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탁월하기 위한 맹목적인 경쟁과 이와 관련된 과도한 사회적, 가족적 압력으로 인해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경쟁과 보완적인 쌍은 협력이다. 생물학적 진화는 확실히 경쟁과 적자생존을 사용한다. 이것이 고전적 다윈주의가 주장하는 바이. 그러나 이제 생태학자들은 생명도 협력에 의해 진화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행성의 전체 살아있는 생태계는 어느 시점에서 협력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생존한다. 그것은 경쟁 종과 개인이 진화하고 생존하는 동안 공존할 수 있도록 한다. 공동선을 위해 함께 사는 개별 종의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몸에 있는 "외부" 세포의 교훈이기도 하며, 문자 그대로 그리스어로 함께 산다는 의미의 "공생"의 대명사이다. 이것은 다른 종들이 함께 살 수있게 해주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 적용될 때 이 용어는 더 큰 전체의 이질적인 부분이 함께, 협력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며 서로를 반대하거나 전멸시키지 않는다.
대화와 협력이 시급하다
역사는 상업, 문화 교류, 영적 진리의 공유와 같은 이질적인 사회 간의 의사 소통이 어떻게 각 사회를 더 좋게 만들고 공동 번영을 허용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공식 역사는 종종 정복자와 전쟁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원한 기억을 얻은 인간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고 종종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중심 메시지와 살아있는 모범은 항상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존경과 사랑의 필수적인 부분은 협력이다.
정복자, 독재자, 전쟁은 왔다가 사라진다. 그것들은 책과 영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만 그 모든 미화 뒤에는 피, 고통, 증오 및 파괴가 그들의 본성과 영원한 유산의 본질이라는 추악한 진실이 있다. 모든 결점과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가 여전히 따라야 하는 이상인 이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협력, 대화, 서로에 대한 존중이기 때문이다.
대화와 협력의 메시지를 전파하려면 실제 사례와 구체적인 결과가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 대화와 협력은 번창하는 학업 환경에서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다. 여러 학문 분야에 걸친 대화를 지지하는 학제간 프로그램이 많은 대학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과학 프로그램은 점점 더 학제간이 되어 사회 과학의 다른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종교 및 예술 분야의 사람들과 의사 소통함으로써 그들은 초학문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그램에는 열린 마음, 용기, 자주 부풀려진 교수의 자존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과학자 그룹과 영적 실천가는 그들의 학문 분야의 공통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우리 자신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대화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상호 이해와 존중이 필수적이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변화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소통의 건강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PART III
이전 블로그에서는 변화와 대화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 정당들, 집단들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화를 상상하는 것이 더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위의 대화 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 개개인과 인간 집단은 보통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을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변화는 자연스럽고 항상 일어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토스가 선언했듯이, "모든 것은 흐른다." 이제는 인간 개개인의 차원에서 변화와 대화의 근본적 측면으로 가야 한다. 그것들은 가장 먼저 개인,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변화와 동일성
앞에서 논의했듯이, 우리의 몸은 항상 변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탄생을 거쳐 잠시 살아남았다가 죽는다. 우리처럼. 하지만, 전체 구조는 어떻게든 똑같다. 그렇지 않으면 유기체 전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우리는 빠르게 죽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물리적 구조를 구성하는 바로 그 세포는 우리의 물리적 구조가 유지되는 동안 변화한다.
하지만 물론 그 구조 자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몇 년 전 페이스북 사진을 잘 살펴보자. 여러분은 아마 여러분의 몸에서 약간의 차이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 사진들 속은 여전히 당신이고, 비록 아주 조금일지라도 당신은 변했다. 이상한 상호보완성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핵심에 있다. 끊임없는 변화는 우리가 같은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안 우리 몸의 특징이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무언가가 우리의 동일성을 전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변화와 소통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필수적이다. 신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우리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기능하고, 살아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육체와 함께, 다른 무언가가 우리를 함께 묶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일단 마음의 본성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그 모든 광범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피하고, 또한 우리는 닭과 달걀의 문제인 소위 심신 문제에 대한 논쟁도 피하기로 하자. 우리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라는 골치 아픈 문제는 일단 피한다. 아마도 뇌에서,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 질문들을 제쳐두자.
우리는 마음이 그것에 기인하는 생각들이 변함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주목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배운 경험과 교훈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꿨다. 그러나 마음은 한결같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습관을 만들면서 비슷한 유형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마음이 우리 몸에 똑같은 "동일함"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기본 구조는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과 자아
위의 질문들이 대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 과학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계속한다. 설령 우리가 재미로 이 질문들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보다 정신적인 존재인지 누가 신경 쓰겠는가? 우리는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요점은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다음 단계를 밟아 우리 자신의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이고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캠프파이어 주변에서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존재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 일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새로운 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실용적인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마음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면 자아는 못생긴 머리를 든다. 변화의 한가운데서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 1차적인지,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몸에 묶는지, 그것들이 다르거나 같은 "동전"의 두 면일지라도, 자아는 저항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신체와 우리가 생각하는 특정한 생각과 동일하고 독특하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자아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한다. 자아는 진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것이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거울 앞을 지나갈 때, 여러분의 자아는 "이봐,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한다. 자아는 심지어 그것이 사심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도 스스로를 돌보는 것에 동기부여를 받는다.
우리의 습관, 관점, 신념 체계,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합쳐서 "나", "나", "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집단적으로 동일하다고 가정하고 우리는 자아가 갇힌 존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마음과 육체는 잊어버리고,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잊어버려. 자아는 우리가 이 제한적이고, 분리된, 독특한 작은 창조물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자아가 자신의 추악한 면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왜 나는 자존심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용어를 사용하는가? 조금만 참아보자.
우선, 자아는 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확실히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에 꽤 확고하다. 그것은 자아가 당신이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한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우리의 의도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럴까? 종종, 우리는 우리의 편안한 습관을 기꺼이 바꾸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안전 지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아의 작용이다.
이상하다! 자아는 육체와 동일시하지만 가난한 육체와 모든 구성 세포는 항상 변한다. 자아는 마음과 동일시하지만 불쌍한 마음은 항상 변한다. 그리고 언젠가 확실히, 100퍼센트 확신으로, 시체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특정한 마음도 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독특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며, 비록 그것의 구성적 기반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항상 자신의 목적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멸을 느낀다. 자아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편안하게 느끼며, 동시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한다.
당신은 삶에는 단지 자아와 확실한 죽음 이상의 것이 있다고 느낀 조용한 순간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그러한 순간들을 숨기고 관심을 자신의 이기적인 필요와 욕망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변화와 대화를 수용하라
만약 우리가 자아가 완전한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진정 무엇이 있는지 물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의 외모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과 쉴 새 없는 마음을 넘어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을까? 그래서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잠시 멈추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과 그 다음 질문,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 자신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을 형성한다.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주제를 꺼내야 한다. 이 경우 대화는 개인과 동일한 개인 사이에 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자아가 만들어낸 모든 교의와 분노에 찬 정의의 소음을 지나쳐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바라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잘난 체하는 자아의 오만한 함정을 지나치고 감히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과학자는 어떻게 될까?
우리 모두는 이 대화가 우리의 집단적 자아보다 더 크기 때문에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우리 자신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자신을 마주하는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지금"에 있고 그리고 나서 우리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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